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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척준경, 소드마스터 사묘아리

행복한 무지개 2018. 12. 1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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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금나라 척준경 사묘아리

 

고려의 무쌍, 소드마스터 척준경.
동시대에 여진족의 금나라에도 척준경과 같은 무쌍, 소드마스터가 존재했습니다.

그 이름은 사묘아리.

오늘은 사묘아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묘아리 그는 여진족의 장수로 고려, 송, 거란을 상대로 한번도 패하지 않는 불패신화의 명장이며,육지전 및 해상전 어디에도 패배를 한적이 없는 최강의 장수이다.

그는 성정적 충직하고 지략이 뛰어났고, 형제간의 우애도 깊었을 만큼 인성또한 훌륭했다.
수많은 업적을 기록한 맹장이며, 후에 왕에까지 봉해졌으며 78세에 숨을 거둘때 그의 시호는 지혜롭고 민첩하다는 뜻의 지민 이었다고 한다.

 

고려의 정사 기록에 척준경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면, 사묘아리의 업적 또한 금사(금나라 정사)에 기록되어져 있다.

금사 사묘아리전에는 그의 엄청난 무훈들이 기록되어져 있다.

 

대 고려전투

 

고려가 윤관의 17만 대군으로 여진 정벌을 시도하자 이를 막기 위해 아버지 혼탄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다.
목리문전 이라는 곳에서 고려 대군과 교전을 벌일때 고려군측 장수를 창으로 찔러 죽여 여진 사기를 올려 고려군을 패퇴시켰다.

이후 석적환의 병력과 합류한 사묘아리는 선봉에 서서 고려군을 박살내며 2개성을 탈환했다.
이후 고려 5만 군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했으나, 사묘아리의 방비에 별다른 소득 없이 퇴각했다.

퇴각하는 고려군을 추격하여 갈라수에서 고려 후위부대와 만났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고려군은 여진의 공격에 당황했고, 사묘아리는 전면에 나서서 고려군을 학살했다.
그로인해 고려 후위 부대는 전멸을 하였고, 다시 5만의 고려군을 공격해 퇴각시켰다.
잠시후 고려 오연총의 7만 고려군과 조우하였고, 이때도 선봉으로 앞장서서 돌격했고, 고려군과 대회전을 치뤘다.
갈라수 전투에서 사묘아리의 맹활약으로 고려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이때 고려군의 피해는 최대 7만명으로 여요전쟁 당시 강조가  이끌던 고려군이 거란군에 대패한 통주전투 이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전투이후 사묘아리는 석적환으로부터 "네가 하루 동안에 강한 적을 세 번이나 격파하였으니, 그 공을 어찌 잊겠느냐?"는 말과함께 큰 상을 받았다.
갈라수에서의 큰 승리를 거둔 이후 사묘아리는 고려의 타길성 공성전에서 성벽을 뚫어 성을 함락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는 고려의 여진 정벌계획을 무너트리는 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대 거란전투

 

사묘아리는 거란국인 요나라를 정벌할때도 많은 공을 세운다.
태조를 따라 거란의 영강주를 함락하고 맹안(병력 1천)을 수여받았고, 신주와 빈주를 함락시킨다.

요나라군 수만 명이 홀사리성을 공격해왔다. 이때 사묘아리에게는 겨우 100기만 있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수하 100기 군사의 옷을 찢어 깃발을 많이 만들어 군세를 많게하는 전략을 세워 수만 요나라 군을 철군시켰다.

항복했다가 다시 배신한 소주와 복주의 10만 반란군과 10여 차례 싸워 격파하여 강물을 시체로 막히게하였다.
그로 인해 물이 흐르지 않았다 한다.


거란과 해족이 1000척의 배로 바다로 도주하자 27척을 이끌고 추격했다.
화살에 두 번 맞아 생사가 위태로웠으나 힘껏 싸워 도주한 거란족과 해족을 격파하고 배를 모두 획득하였다.

거란 소고아구근의 병력 수만이 호리특채를 공격해오자 800명으로 이를 격파했다.

 

 

 

 

대 송 전투


1126년 1차 개봉 포위전에서는 사묘아리가 교각을 확보하여 황하를 건너 힘껏 싸웠다.
다음 해인 1127년에 다시 송을 정벌하자 사묘아리는 보주와 중산에 이르러 누차 적을 격파하였다.
1128년에 남송의 고종을 토벌하였는데 양곡현과 신현을 취하고, 해주의 남송군 8만 명을 깨트리니 해주가 항복하였다.
적선 만여 척을 양산박에서 격파하였다.
도적이 범현을 공격하자 격퇴하였고 배 700 척을 획득하였다.
남송의 장수 강민이 장삿배 400척을 모아 수춘과 가까운 곳에 있을때 400기로써 강민을 격파하고 수천 명의 목을 벴다.
당해 및 대고와 함께 회남에서 적 십만을 격파,  배 200 척을 획득했다.
종요의 섬서 공략전에 1맹안(1천명)을 이끌고 참여해 위주 함락시켰다.

남송이 칭신하고 재물을 바치자 희종은 사묘아리에게 천만전을 하사하였다.

 

 

 

 

사묘아리...

전시에 늘 머리를 묶고 종군하여 수십 번의 싸움을 치뤘고, 남송 정벌전 당시부터 수전을 익혀 수성이라 불리운 그였다.
동시기 고려의 척준경, 송의 한세충 비견되는 맹장이 사묘아리이다.
동시대에 활약한 명장이었던 한세충, 척준경과 달리 말년도 평안하게 보냈다.

고려와의 갈라수 전투때 윤관의 곁에 늘 척준경이 있어서 척준경과 사묘아리가 조우하지 않았을까라고 많이들 추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두사람이 맞붙었다는 기록이 없어서 아쉬움을 자아낸다.
고려의 무쌍 척준경과 여진의 무쌍 사묘아리가 붙었다면 누가 이겼을까.
너무나 궁금하지만, 역사적인 그날에 이루어지지 않은 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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